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알 마드리드 CF (문단 편집) === [[엘 클라시코]] === || {{{#!wiki style="margin: -5px -2.5px; padding: 3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bottom, #fff 0%, #f0f0f0)" [[파일:레알 마드리드 CF 로고.svg|width=50%]]}}} || {{{#!wiki style="margin: -5px -2.5px; padding: 3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5273d 15%, #263f6e 15%, #263f6e 29%, #b5273d 29%, #b5273d 43%, #263f6e 43%, #263f6e 57%, #b5273d 57%, #b5273d 71%, #263f6e 71%, #263f6e 85%, #b5273d 85%)" [[파일:FC 바르셀로나 로고.svg|width=50%]]}}} || || '''{{{#000 레알 마드리드 CF[br]Real Madrid C.F.}}}''' || '''[[FC 바르셀로나|{{{#ffd400 FC 바르셀로나[br]F.C. Barcelona}}}]]''' || ||<-2> '''{{{+1 엘 클라시코 (El Clásico)}}}''' || [[파일:external/1.bp.blogspot.com/19453_297065314122_612314122_3450362_44525_n.jpg]] [[파일:external/larkascending.files.wordpress.com/camp-nou.jpg]] [[파일:external/www.scaryfootball.com/santiago-bernabeu-classico-classic-real-madrid-barcelona.jpg]] 시작은 조안 감페르와 스페인을 [[쿠데타]]로 장악했던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의 대립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리베라가 딱히 레알을 지지한 것도 아니고, 감페르보다 리베라 정권이 빨리 무너졌기 때문에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조안 감페르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이 또한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것이고 리베라와는 관계없었다. 문제는 [[스페인 내전]] 시기이다.[* 단,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에 라리가는 당연히 진행이 중단되었다. 나라 전체가 전쟁 중인데 축구 리그를 진행할 정신이 있을 리가 없다.] 이 시기 축구계의 대표적인 인물이 주젭 수뇰이다. 본래부터 '''카탈루냐 독립파이면서 강성 [[좌파]]'''였고, 태생적으로 정치가의 아들이면서 카탈루냐 좌익 정파였던 ERC의 당원이기도 했으며, 좌익 신문 라 람블랴의 창립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수뇰이 1935년 카탈루냐 축구 협회장이자 바르셀로나 회장이 된다. [[FC 바르셀로나]]에 [[카탈루냐]] 민족성에 더해서 반 정부 성향이 강해진 것이 이 시기였다. 그리고 1년 후인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터졌고, 수뇰은 [[프란시스코 프랑코]] 추종 세력으로 추정되는 세력에게 총살을 당해서 [[암매장]]되었다. 일단은 프랑코 세력이라고 추정하긴 하는데, 스페인 내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라서 누가 죽였는지가 확실하지 않다. 일단은 프랑코 세력이라는 것이 정설이긴 하다. 참고로 수뇰의 시체가 발견되는 데는 50년 세월과 '수뇰의 친구들'이라는 카탈루냐 [[민족주의]] 단체의 꾸준한 노력이 필요했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서 FC 바르셀로나와 수뇰은 [[카탈루냐 독립운동]]과 반프랑코 투쟁의 상징이 된다.[* 원래는 여기에 좌익 성향도 더해져야 하지만, [[소련]]이 붕괴되고 공산주의의 패배가 확실해진 이후로 그런 성향을 띤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FC 바르셀로나의 강경한 [[분리주의]]와 반프랑코 성향이 본격화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이 이전의 FC 바르셀로나는 [[RCD 에스파뇰]]을 포함한 이 지역 축구 협회에 모두 관여하기도 하는 등 딱히 민족 분리나 독립 성향이 강하지 않았다. 단적으로 바르셀로나의 2대 회장이자 최초의 카탈루냐인 회장인 바르톨로메우 테라다스는 카탈루냐 축구 협회장도 겸임하면서 사재를 동원해서 '''[[RCD 에스파뇰]]의 창단에 재정적 지원을 했다'''. 다만 이 시기의 바르셀로나는 좀 많이 골 때린다. 애초에 스페인 내전 자체가 골 때리지만, 특히 카탈루냐는 바르셀로나 내전까지 겪으면서 난리를 쳤다. 때문에 이 시기를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발로로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무리이다. 막상 이 시기 카탈루냐에서 대중정치를 주도한건 예나 지금이나 카탈루냐 민족주의자들과 사이가 불편하고 [[반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아나키스트]] 거대노조 [[CNT]]였기 때문이다. 진짜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바스크]] 지역은 대놓고 왕따를 자처해서 남부와는 아무런 연대도 하지 않다가 각개격파되었다. 반면 바르셀로나는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봐도 알 수 있지만 이합집산의 극한을 보여줬다. 스페인 내전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면서 총통의 자리에 오른 프랑코는 스페인 [[국가주의]]를 주장했다. 모든 지역에서 지역색을 빼는 작업을 시작했고, 그중에서 가장 강한 타격의 대상이 된 것이 좌익이면서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스페인 내전 시기 거의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카탈루냐 지역이었다.[* 바스크를 제외한 것은 프랑코 이전에도 바스크는 저항 세력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프랑코 정권이 프랑코 말년에 힘을 잃고 무너지게 된 것은 [[ETA(바스크)|ETA]]를 비롯한 바스크 세력의 저항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히고 있다. [[FC 바르셀로나]]는 그에 비하면 영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프랑코는 모든 축구팀의 명칭은 스페인어로 쓰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서 영어식으로 'Football Club'의 약자인 'FC'를 사용하던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어 문법에 따른 명칭'''인 'Club de Futbol'의 약자인 'CF'로 바꾸어야 했다.[* CF가 레알 마드리드 CF의 그 CF이기 때문에 레알 따라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CF는 평범한 스페인어일 뿐이고, 사용하는 팀도 정말 많다.] 그리고 스페인 외 민족적이고 지역적인 상징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카탈루냐 기를 사용했던 바르셀로나의 엠블럼 역시 교체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만 엠블럼 변천을 보면 잘만 들어 있어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한 1940년 프랑코 지지자였던 엔리케 피녜이로가 바르셀로나 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바르셀로나 경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인물의 취임이었는데, 오히려 나중에는 바르셀로나를 정치 압력에서 보호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단적으로 엔리케 피녜이로 회장 재임 시기인 1943년 6월 [[코파 델 레이|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준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경기는 노골적인 경기 조작이 있었다. 1차전 홈 경기에서 바르셀로나가 3 대 0으로 승리한 이후, 차마르틴 경기장에서 벌어진 레알 마드리드의 홈 경기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11 대 1로 승리했던 것이다. 이 경기에서 보안부장이 전반전 시작하기 전에 바르셀로나에 대해 "너희들이 경기를 할 수 있는 건 위에서 눈감아주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협박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피녜이로는 이에 대해서 항의하고 사임했다. 이후 바르셀로나 회장직은 프랑코 체제 임명 시기를 짧게 거치다가 오히려 강경한 대응이 더 문제를 야기한다는 판단이 내려져서 카탈루냐 출신 임명을 거쳐서 자체 선임으로까지 변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스페인 왕립 축구 연맹|스페인 축구 협회]]는 해당 경기를 무효로 처리했고, 이후에 레알 마드리드 회장으로 취임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했다.[* 다만, 이 사건을 가지고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이 레알 마드리드를 지원했다고 할 수는 없다. 프랑코는 레알이 좋아서가 아니라 바르셀로나가 싫어서 경기를 조작한 것이었고, 그 증거로는 이 시즌 [[코파 델 레이|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팀은 프랑코에 끊임없이 저항하던 [[바스크]]의 팀 [[아틀레틱 클루브]]였다.] 그러나 이후 1978년까지 이어진 프랑코 치세에서 바르셀로나는 [[라리가]] 우승 8번, [[코파 델 레이]] 우승 10번을 차지했고, 오히려 레알 마드리드는 21년 간 무관 세월을 보내야 했다는 점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대한 프랑코의 실질적인 지원이 있기는 했냐는 비판도 존재한다. 프랑코 정권의 비호를 전면 부인하는 것은 어려우나, 실제로 21년 무관까지 겪은 레알 마드리드가 잘나가기 시작한 것은 프랑코보다는 회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활약 덕분이었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 발발 시기 레알 마드리드 회장이었던 라파엘 산체스 게라는 대표적인 [[공화주의자]]라서 프랑코의 정적이었고 내전 이후 감옥살이를 했다.[* 원래는 사형이었으나 내전 중에 공화국 지역의 우익들을 숨겨줘서 사형은 면하고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훗날 프랑스로 탈출했다가 다시 1959년에 돌아와서 1964년에 사망했다.] 부회장과 재무 담당자도 같이 죽었고, 후임인 후안 호세 바예호와 안토니오 오르테가 역시 레알 마드리드 역사에 이름도 올리지 못했다. 특히 안토니오 오르테가는 공화군 소령으로서, 바르셀로나의 수뇰 같은 공화주의 좌파라서 내전 이후 [[군사재판]]에 넘겨져 처형당했다. 프랑코 독재가 가장 심했던 초기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런던]]으로 도망쳐서 변호사 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프랑코의 우파 국가주의와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민족주의&좌익 성향의 대립에, 앞서 언급된 레알 마드리드와 관련된 승부 조작 사건의 임팩트가 더해져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카탈루냐]]와 [[카스티야]]라는 해묵은 민족 간 대립이 오히려 격화되었다. 그런데 이게 진짜로 이 시기에도 심각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는 것이, 이 시기를 대표한 바르셀로나 선수라고 한다면 바르셀로나 골수 팬들 중에서 일부는 [[요한 크루이프]]보다도 사랑한다는 [[라슬로 쿠발라]]를 들어야 할 것인데, 쿠발라는 말년을 왕년의 라이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함께 [[RCD 에스파뇰]]에서 보냈다. 그리고 쿠발라는 에스파뇰에서 선수 말년을 보낸 것과 별 상관없이 바르셀로나의 감독직을 지내기도 했다. 이 시기 레알과의 라이벌 의식이 진짜로 카탈루냐와 카스티야의 민족주의 의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바르셀로나가 이 시기에 레알 마드리드에게 패권을 넘겨준 영향인지는 좀 심각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 고려를 해야 할 것은, 바르셀로나와 에스파뇰의 관계는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카탈루냐의 카스티야에 대한 감정은 역사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쿠발라의 일화로만 이를 유추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의 여지가 있다. 반대의 예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경우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로 남았으나 그의 영입 과정에서부터 레알 마드리드와의 대립이 있었다. 바르셀로나가 먼저 접근했으나 레알 마드리드의 개입으로 공유(?)를 하게 되었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해서 바르셀로나 측이 이를 포기하면서 그는 레알 마드리드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바르셀로나에서 레알 마드리드로, 레알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선수 이적은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사건 이전이긴 하지만 [[주젭 사미티에르]] 같은 인물은 선수와 코칭 스태프, 그리고 프런트 생활을 모두 레알과 바르셀로나를 오가면서 하기도 했다. 바르셀로나 선수, 레알 선수, 바르셀로나 코치, 레알 코치, 바르셀로나 이사 이런 식으로 살았다. 그래서 별명이 '''왕복 비행기'''였다.] 드물게 있었던 두 팀 간 이적에서 [[루이스 피구]] 사건만큼 두 팀의 갈등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는 드물 것이다. 피구는 바르셀로나에서 부주장의 위치까지 오르며[* 당시 주장은 [[펩 과르디올라]]였다.]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사랑을 한몸에 받아왔다. 피구 본인도 레알 마드리드를 신나게 디스하면서 바르셀로나의 심장으로까지 여겨졌다. 그러나 2000년에 무시무시한 계약 파동 끝에 바르셀로나 최대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피구와 에이전트가 주급 인상을 요구하며 레알과 바르셀로나 사이를 오가다가 [[바이아웃]]을 발동한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결국 시즌이 지나고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인 [[스포티파이 캄 노우]]에서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엘 클라시코]]가 열린 날, 10만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fuck|FUXX]]과 [[수전노]] 등 야유를 한몸에 받고 '''[[돼지머리]] 투척'''까지 당하면서 경기를 망쳤다. 이렇듯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간의 더비 매치, 즉 [[엘 클라시코]]는 그 명성답게 화려하면서도 두 지역 간의 엄청난 반감정 때문에 누구 하나 작살이 날 것 같은 무서운 분위기로 진행되곤 했으나,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주요 선수들로 이루어진 스페인 대표팀이 2008 유로, 2010 월드컵, 2012 유로에서 3연속 메이저 대회 우승을 거두고 두 팀 선수들 사이에 스페인 국가대표라는 유대감이 생기면서 꽤 훈훈한 분위기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2010년에 레알 마드리드가 대패했을 당시 [[세르히오 라모스]]가 돌아버려 [[리오넬 메시]]와 [[카를레스 푸욜]], [[차비 에르난데스]]를 차고 때렸던 것처럼 승부에서 지면 난폭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지역감정이나 팀 간의 적개심과는 별개로 레알 마드리드의 [[곤살로 이과인]]은 [[엘 클라시코]]가 벌어지면 맨 처음 하는 행동이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를 찾아가서 껴안고 뽀뽀하고 별 짓을 다하는 것이었다. 메시 역시 이렇게 행동하는 이과인을 흔쾌히 받아들였었다. 엘 클라시코이기 이전에 [[아르헨티나|같은 국적]]의 동질감 때문에 메시와 이과인은 엘 클라시코 라이벌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매우 친분이 깊다. 카스티야와 카탈루냐 출신들이 아닌 데다 같은 국대 선수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거니 팬들 역시 오히려 보기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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